["선언문: 지침, 위안 및 영감", 이 제프리 힐, 리아호나 2006년 4월호]

선언문:지침, 위안 및 영감
The Proclamation: A Guide, a Comfort, and an Inspiration

   이 제프리 힐
   
브리검 영 대학교 가족 생활 부교수

   이 제프리 힐, 선언문: 지침, 위안 및 영감, 리아호나 2006 4월호, 28

   1995년 9월에 있었던 상호부조회 총회에서,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준비한 문서를 낭독했다. “가족: 세상에 전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기 전에, 힝클리 회장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혼란스러운 곳이며 가치가 전도되는 곳[입니다]. 시간이 입증해 준 행동 표준을 저버리는 일을 하도록 유혹하는 강력한 소리가 있습니다. … 표준과 가치관에 관한 많은 속임수에 대해, 서서히 세상의 죄악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그토록 많은 유혹과 권유에 대해, 우리는 주의시키고 미리 경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세상의 속임수에 굳건히 맞섬”,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99~100쪽) 이 선언문은 그것이 쓰여진 이래로 가치관이 계속 전도되고 도덕이 점점 쇠퇴해가면서 그 내용이 예언적이었음을 입증했다. 본 기사는 선언문에 나와 있는 원리들이 어떻게 가족들이 역경의 시기 가운데서도 평안과 행복을 성취하도록 도울 수 있는지 설명해 준다.

 

1995년 9월 23일은 내 인생을 변화시킨 날이었다. 스테이크 고등평의회 일원이었던 나는 상호부조회 총회 방송 모임에 참석해야 했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님께서 말씀하셨으며, 나는 처음으로, “가족: 세상에 전하는 선언문”의 내용을 들었다.

그 즉시 점점 밝아지는 빛이 내 정신과 마음을 비추었다. 나는 말씀에 완전히 몰두해 귀 기울였다. 나는 바로 얼마 전 가족 연구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마쳤지만, 이제 대학원에서 거의 5년간 공부한 것보다 더 순수한 가족에 대한 진리를 5분이라는 시간 동안 들었다. 나는 일어서서 갈채를 보내고 싶었다. 힝클리 회장님이 말씀을 끝맺으시는 동안 나는 이 원리를 우리 가족에게 적용하고 세상과 나누어야겠다는 커다란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선언문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마침내 연차 대회 특집호가 오자 나는 선언문을 몇 번이고 거듭해 읽었다. 깊이 생각하고 기도했다. 나는 그 말씀들을 속속들이 이해하여 그것이 영원히 내 자신의 일부가 되기를 바랐다. 그때 나는 그것을 외워야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나는 40대 중반이었으며 암기 능력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거듭해서 다음과 같은 속삭임을 느꼈다. “선언문을 외워라. 선언문을 외워라! 선언문을 외워라!”

나는 어디를 가든지 선언문 사본을 가지고 다녔다. 면도를 하면서도 외웠다. 대학교로 걸어가면서도 외웠다. 운동을 하면서도 외웠다. 잠들기 전 머릿속에 맴도는 마지막 말들과 일어나자마자 떠오르는 말들은 선언문의 말들이었다. 외우는 데 기적적인 도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외우는 과정은 힘들 정도로 더뎠다. 그러나 한 달쯤 지나고 나서 나는 선언문 전체를 외울 수 있었다.

 

선언문을 적용함

다 외우고 나자 나는 계속해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운동과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 선언문을 여러 번 암송하곤 했다. 내가 암송하는 동안 영은 특정한 단어나 문장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 구절들에 대해 생각하면, 그 구절들은 우리 가족과 나에게 축복을 가져다 줄 생각들을 속삭여 주곤 했다.

예를 들어, 나는 지난 여름 십대의 딸아이가 아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친구들에 대해 걱정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자 딸은 내가 말한 것들을 무시하고 내게서 더 멀어졌다. 어느 날 아침 조깅을 하면서 선언문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영이 일곱 번째 단락 마지막 문장에 초점을 맞추게 해 주었다. “필요한 경우, 친척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 나는 조깅 속도를 줄였고 머리 속에 여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생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으며, 현재 일곱 번째 아이의 산달이 다 되어 있었다. 내가 받은 느낌은 바로 우리가 친척으로서 그녀에게 즉시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비행기 표를 사 주면서 고모 집에 가서 도움을 드리며 일주일 정도 지내 달라고 부탁했다.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딸아이는 낮에는 내 동생의 가족을 도우면서 기쁨을 얻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모두 잠든 후에는 내 동생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생은 내가 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내 딸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십대 시절에 내린 결정이 어떻게 어려움으로 가득한 인생을 가져다 주었는지 딸에게 말해 주었다. 딸아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이는 무엇인가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활을 축복해 주는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내 동생, 동생의 가족, 내 딸, 그리고 나는 모두 선언문에 있는 말씀으로 인해 일어난 이번 여행을 통해 축복을 받았다.

또 한번은 “부모는 자녀를 사랑과 의로움으로 양육하고, 그들에게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필요한 사항을 충족시켜 주며”라는 말씀으로 인해 크게 우려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우리의 영적인 잠재력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다. 선언문에 있는 말씀으로 인해 아내 후아니타와 나는 금식일 교회 모임을 마친 후 가족 간증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첫 번째 모임은 자녀들의 영적인 필요 사항을 충족시켜 주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녀들 중 누구도 그 모임에 별로 참석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몇몇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불평했으며, 막내는 “언제 끝나요?”하고 몇 번이나 물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 나갔으며 몇 달이 지나자 불평이 그쳤고 좀 더 영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가족 간증 모임은 거룩한 진리를 나누고 “우리가 자녀를 사랑과 의로움으로 양육하도록” 도움을 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되풀이되는 어떤 형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선언문에 있는 말씀을 자주 살펴보자 그 말씀은 영이 아내와 내게 가족을 전진시키게 하는 영감을 줄 수 있는 길이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영감이 제시한 예만큼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아빠랑 딸의 데이트에 한나를 데려간다”, “오늘 밤에는 후아니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혹은 “에밀리에게 더욱 귀 기울여 듣는다”, “세스를 좀더 자주 재운다”등과 같은 아이디어로 떠올랐다. 그러나 수백 가지 작은 지침들이 모여 훨씬 나은 가족 생활을 하도록 해 주었다.

 

역경 속에서의 위안

2001년, 후아니타는 유방암이 상당히 진행되어 있으며 앞으로 5년밖에 더 살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50퍼센트라는 진단을 받았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적극적이지만 매우 힘든 화학 요법, 수술, 그리고 방사능 치료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8주간의 메스꺼운 화학 요법 후에도 커다란 종양이 전혀 줄어들지 않자 몹시 낙담했다. 이 시련의 기간 동안 나는 내가 느꼈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조깅을 하면서 최대한 큰 소리로 선언문을 암송했다. 그것은 내게 위안이 되었다.

하루는 조깅을 하면서 “성공적인 결혼과 가족은 신앙, 기도, … 등의 원리 위에서 이루어지고 유지된다.”는 말에 이르렀을 때, 나는 멈추어 섰다. 머릿속에 한 가지 느낌이 떠오르며 나는 평화를 느꼈다. 그날은 금식일 전 토요일이었는데,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화학 요법이 효과가 있도록 후아니타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고 신앙을 행사해 줄 것을 부탁해야겠다는 영감을 받았다. 우리는 참으로 놀랄 만한 지원을 받았다. 심지어는 다른 종교를 가진 친구들까지도 금식과 기도의 강력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가 부탁한 것도 아니었는데 호주, 일본, 하와이, 솔트레이크, 보스턴, 벨기에 및 남아프리카에 있는 친구들이 후아니타의 이름을 성전 기도 명단에 적어 넣었다. 결과는 기적적이었다. 우리의 기분과 신앙이 즉시 향상되었다. 그 후 4주 간 치료를 받는 동안 종양은 거의 완전히 없어졌다. 후아니타는 치료를 마쳤으며, 걱정할 정도의 암은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나 감사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시련이 끝나거나 선언문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가져다 준 위안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2004년 초, 후아니타의 암이 재발했는데 이번에는 폐암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의사는 몹시 심각한 목소리로 가능한 한 암을 제압하도록 노력해 보겠지만, 가능한 치료법은 없다고 했다. 처음에 나는 배신당한 느낌이 들었고 희망을 잃었다. 후아니타와 나는 의로운 소망과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함께 선교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영적으로 강화해 주고자 한 손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다시 한번 선언문을 읽어 보았으며 이번에는 누군가 다음과 같은 말씀이 눈에 띄도록 섬광을 비추는 것 같았다. “자녀들은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태어나 결혼 서약을 완전하고 성실하게 지키는 부모에게 양육받을 권리가 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부모(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에 의해 양육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학적으로 볼 때 나을 가능성이 매우 적었지만 이 말씀은 후아니타가 기적적인 축복을 받아 고침을 받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내 마음을 채워 주었다.

 

초점의 변화

우리는 약 육 개월간 비교적 평범하고 희망에 찬 생활을 했지만, 그 후 암은 눈에 띄게 진행되어 갔다. 후아니타는 체중이 급격히 줄었으며 거의 끊임없이 불편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도 그녀가 호흡하는 것을 힘들게 했다. 상황이 줄곧 나빠지기만 하고 전혀 좋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후아니타가 오래 더 살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그토록 필요로 하고 간절히 바랐던 기적을 일으켜 주시지 않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선언문에 있는 말씀이 영감과 위안을 주었다.

“거룩한 성전에서 행해지는 의식과 성약은 개개인을 하나님의 면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며 가족을 영원히 하나로 결속시켜 준다.” 나의 이해력은 많은 눈물을 통해 넓어져서 후아니타가 기적적인 치유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원의 계획으로 인해, 후아니타는 이 세상을 떠나 그녀의 아버지, 먼저 죽은 우리의 딸, 그리고 구주에 의해 환영받는 아름다운 곳으로 갈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후아니타는 고침을 받고 부활할 때에 암과 다른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육신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또한 우리 자녀들이 영원을 통해 그들 어머니로서의 그녀의 영향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또한 기적이었다.

나는 또한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그녀의 지혜를 전해 주기 위해 아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물리적인 기적에 신앙의 초점을 맞추는 일을 중단하고, 그 대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가 후아니타에게 최대한 많이 배우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때라는 분명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며 가족을 영원히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해 더욱 잘 준비해야 했다. 가족 간증 모임에서 우리는 이러한 느낌을 강하게 표현했으며 그 진리는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 다음 우리는 행동에 착수했다.

후아니타는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에 대한 자신의 간증을 적었으며 나도 나의 간증을 적었다. 우리는 간증을 인쇄해서 우리 사진과 함께 자녀들의 경전에 맞는 크기로 코팅했다. 후아니타는 각 자녀에게 감사를 표현하며 격려와 권고를 전해 주는 장문의 편지를 자필로 썼다. 우리는 후아니타의 감미로운 음성으로 찬송가, 초등회 노래, 그리고 어린이 자장가를 녹음하여 자녀 한 명 한 명과 미래의 손자 손녀들을 위한 CD를 만들었다. 우리는 또한 성전에 갈 때, 선교 사업을 하러 떠날 때, 결혼할 때, 아기가 태어날 때와 같이 특별한 경우 들을 수 있는 메시지를 녹음했다. 후아니타는 앞으로 태어날 손자들을 위해 코바늘로 아기 이불과 턱받이를 떴다. 우리 삶은 이제 중심이 있었고 활동으로 가득했으며 영에게 큰 위안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은 선언문을 통해 온 영감의 결과였다.

 

“저도요”

우리 자녀들 모두 후아니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의 곁에 있었으며 각자 그녀와 함께 애정이 담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후아니타는 숨을 거두기 10분 전까지 정신이 깨어 있었고 우리와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그녀에게 “사랑해”라고 말했으며 그녀는 스페인어로 “로 미스모(Lo mismo)”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당신도”라는 뜻이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의 임종은 감미로웠다.

10년 전 그 토요일 저녁 처음으로 그 선언문을 들은 이후로, 나는 나와 내 가족에게 구체적이며 개인적인 방법으로 주어진 수많은 축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상상할 수 없는 시련 속에서도 가정 생활의 큰 기쁨과 행복을 위한 기반이 될 수 있다. 나는 “가족: 세상에 전하는 선언문”이 오늘날의 가족들을 위한 영감 받은 말씀이며, 진지하게 그것을 연구한다면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 신성한 도움의 창문이 열리리라는 사실을 영을 통해 알고 있다.

(선언문: 지침, 위안 및 영감, 이 제프리 힐, 리아호나 2006년 4월호, 28)

  • 이 제프리 힐은 유타 주 오렘 캐년뷰 스테이크 캐년뷰 제5와드 회원이다.